경의선 숲길을 지나다가 인도에 불쑥 나와있는 지렁이 한마리를 발견했다. 사람의 발길로 단단히 다져진 땅이기에 지렁이가 파고 들어갈 틈은 없었다. 인파가 적지 않은 곳이라 구해주지 않으면 조만간 밟혀 죽을 것이 불보듯 뻔했다. 지렁이를 도와주려는 생각을 하던 찰나에 문득 생각을 했다.
죽어가는 지렁이를 도와주는 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에 대한 판단은 그리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환경을 위하는 관점에서 지렁이를 구해주는 것이 나을까? 지렁이는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식물들이 숨을 쉴 수 있게 만들어주는 존재라니 말이다. 하지만 지렁이가 사람에게 밟혀 죽는다면 그것 또한 자연의 섭리 중 하나일 수 있지 않을까? 지금 지렁이의 개체수가 과도하게 늘어나서 지렁이가 인도에 까지 침범한 것이라면 이 지렁이의 죽음을 통한 개체수 조절이 오히려 환경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이 부근에 얼마나 많은 지렁이가 살고 있는지, 또 어느정도의 지렁이 개체수가 적당한지에 대해서 모르는 나로서는 확실한 답을 낼 수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내 양심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화생물학적으로 모든 감정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 인간은 왜 새끼 동물들을 보면 귀엽고 가여운 마음이 들까? 먼 인류 중 강아지나 망아지 같은 동물의 새끼들을 귀여워 하지 않는 인간들은 일찍이 핏줄이 끊겼을 것이다. 자연을 과하게 착취하는 인간은 생태계를 황폐하게 만들고 결국 그것을 초래한 인간 마저도 굶어죽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내가 지렁이를 보고 들었던 가여운 마음은 영겁의 세월을 걸쳐 만들어진 자연선택의 결과이다. 이런 가여운 마음이야 말로 우리를 이롭게하는 선조들로부터의 위대한 지혜가 아닐까? 이런 생각에서, 나와 내 주변 사람을 위한 더 나은 선택은, 불쌍한 동물들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