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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익을 위해서 산다

2024-03-28

Life Lesson

유가 사상에는 견리사의(見利思義)라는 말이 있다. 이익을 보게 되거든 정의를 생각하라는 뜻이다. 이 말은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자로가 성인의 덕목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가 성인의 덕목 중 하나로 든 것이다. 동양에서는 예전부터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 추구를 경계해 왔다. 공동체가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을 줄이고 도덕적인 덕목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사상에서도 비슷한 관점이 존재한다. 칸트는 어떤 행위의 결과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지의 여부는 그 행위의 도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도덕은 조건 없이 의무감에서 실행되어야 한다. 이것을 칸트는 ‘정언명법’이라고 표현했다. 이렇게 보자면 분명 세상에는 분명 이익과는 다른 가치가 있어 보인다.

도덕은 다소 주관적인 개념이기에 도덕의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유가 사상이나 칸트 철학에서 처럼 이익과 무관한 방식으로 도덕을 바라본다고 해도, 우리는 도덕 법칙의 준수가 개인과 사회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경우를 빈번히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특정 지역의 요식업 업체들이 식재료의 원산지 표기를 속이고 가장 질 나쁜 재료만을 써서 장사를 한다고 해보자. 시간이 지날 수록 음식점을 찾는 손님들 중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아질 것이고, 해당 지역 음식점의 방문 빈도도 점차 줄어들 것이다. 이는 결국 음식점 주인들에게도 손해로 돌아오게 된다. 반대로 해당 음식점들이 모두 식재료의 원산지를 올바르게 표기한다면, 장기적으로 더 많은 손님들이 해당 지역 음식점들을 방문할 것이다. 원산지를 올바로 표기한 것이 음식점 주인들이 자신의 이익을 생각해서 한 것이 아닌 그저 자신의 양심을 따른 결과라고 할지라도, 이 행위는 여전히 자신의 이익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결혼이란 약속 또한 이익의 관점에서 재해석해 볼 수 있다. 모든 부부에 해당하지는 않지만, 많은 결혼한 부부들은 자녀를 낳아서 양육한다. 한명의 인간 아기를 키우기 위해서는 10년 이상의 긴 시간 동안 어른의 관심과 보호가 필수적이다. 부모중 한 쪽만이 아이를 책임지게 된다면, 아이를 교육하고 돌보면서 동시에 자신과 아이를 먹여 키우기 위한 생산활동을 하기가 매우 어려워 진다. 하지만 부모 모두가 한 아기의 성장을 위해 한 가정만을 위해 집중하고 오랜 시간 협력하기로 약속을 한다면, 아이를 돌보면서 동시에 생산활동을 수행하기가 상대적으로 매우 쉬워지게 된다. 또한 보다 장기적인 경제 계획을 세울 수도 있게 된다.

이익과 무관하게 여겨지는 인간의 가치가 도덕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혹시 예술은 어떠한가? 예술을 위한 활동들은 과연 그 자체로 이익을 위한 활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예술적 활동의 경우 그것이 이익에 기여하는지의 여부가 도덕법칙에 비해서 덜 분명할 수 있다. 많은 경우 예술 활동은 먹고 사는데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지는 않으며, 누군가는 예술가들이 상대적으로 빈곤한 삶을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술이 이익에 기여하는 바가 없다고 섣불리 단정할 수는 없다. 예술은 간접적이지만 매우 강력한 방식으로 인간의 이익에 기여하고 있을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술을 통한 인간의 결속력을 강화를 생각해보자. 사람들이 많이 모이게 되는 행사에는 대표적으로 콘서트가 있다. 음악이라는 예술 수단을 통해, 수천 수만명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는 것이다. 또다른 예로 국기와 애국가를 생각해보자. 세계의 모든 나라들은 국가들은 국기와 애국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예술 수단을 통해 집단은 공동의 기억과 공감대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더 강력한 결속력을 얻게 된다. 이렇게 얻어진 결속력은 소수의 사람들이 할 수 없는 보다 크고 장기적인 국가단위의 생산 계획을 가능하게 한다.

이렇게 이익과는 별개로 여겨지는 많은 종류의 가치들이 사실은 이익을 위한 측면이 있다는 것은,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실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진화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이익이란 무엇일까? 이익이란 내가 잘 생존하고 자식을 낳아 대를 잇는데 도움을 주는 모든 것을 이익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개체의 관점에서 일면 비합리적으로 보이는 진화 형태도 대부분의 경우 자세히 알고보면 알고 보면 매우 합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흡혈 박쥐의 경우 동료가 충분한 피를 먹지 못했을 때, 자신이 먹은 피를 토해내어 공유하는 행동을 인다. 이러한 행동은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을 공유하는 극단적인 형태의 이타주의로 볼 수 있다. 이러한 행동은 단기적으로 개별 박쥐의 생존률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그룹 전체의 생존률을 높이는데 큰 도움이 된다. 개미나, 벌 등이 외부 침입자에 대해 자살적 방어전략을 취하는 것 또한 해당 집단 전체의 생존을 돕는 매우 합리적인 진화 결과이다. 특정 개체가 혼자만의 이익을 아무리 도모할지라도, 자신이 속한 집단 자체가 소멸해버리게 된다면 자연히 자신도 살 수 없게 된다. 때문에 위의 이타주의적이고 공동체적인 행위도 궁극적으로는 집단 내 평균적인 개체의 생존 확률을 높여주는 매우 합리적인 진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인간도 다른 생물들과 크게 다를 것은 없을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특성들, 양심, 정의감, 애국심, 예술에 대한 갈망 등 많은 특성들은 개인의 단기적인 이익의 관점에서는 비합리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보다 큰 집단의 장기적인 생존 관점에서 생각하면 달리 볼 여지가 충분하다.

진화적 자연선택은 얼마나 까다로운 절차일까? 가상의 한 종을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이 종이 세대를 거칠 때 마다 한 세대의 절반이 자손을 남기는데 성공 하였다고 가정해보자. 한 세대를 거친 생존개체들은 50%의 자연 선택 확률을 가질 것이고, 두 세대를 거친 생존개체들은 25%, 세 세대를 거치게 될 경우 12.5% 의 선택 확률을 가지게 될 것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역사는 대략 20만년정도 된다고 한다. 인간의 한 세대를 30년이라고 둬보자. 또 한 세대에 3%의 사람이 자손을 잇지 못하고 죽었다고 가정해보자. 한 세대에 3%만 걸러지기에 앞의 예시에 비해서는 꽤 많은 개체가 대를 잇는데 성공할 것이다. 이렇게 20만 / 30년 = 6666세대를 반복하고 나면 최종적으로 남게되는 자손들은, 약 99.7 % ^ 6666 = 0.00…(80개의 0 생략)…001 % 보다 낮은 자연선택 확률을 가지게 된다. 이는 태초 인류부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현생 인류의 유전자 조합이 선택될 확률이 바다 전체에서 특정한 물방울 분자 하나를 뽑아낼 확률 보다도 적다는 것을 의미한다.

20만년간 인류는 천적을 피해다니며, 식량을 얻기위해 동분서주하며, 때로는 다른 인간과의 전쟁을 거치며 지리한 자연선택의 과정을 거쳤다. 이 희박한 확률을 뚫고 살아남은 것이 현재의 인류라는 것을 고려할 때, 인간에게 발견되는 솜털과 같은 미세한 특성 하나하나가 개체의 이익을 위해 고도로 발달한 기능으로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나는 과감하게, 인간의 모든 가치관은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여기서 잠깐 이런 재밌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가 이익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왜 이익을 위해 계산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경멸감을 느끼는 걸까? 이 부분에 있어서는 우리가 이익에 반하도록 진화한 것이 아닌가? 위에서 인류가 이익을 추구하도록 진화했다고 말할 때, 이 이익추구라는 것은 반드시 의식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위험에 처한 자식을 위해 몸을 던질 수 있는 부모의 마음은 결코 의식적으로 계산되는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생각을 거치지 않고 본능적으로 나오는 반응에 가깝다. 양심,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능력 등 인간의 많은 특성들은 특별한 생각을 거치지 않고도 발현된다. 이러한 특성 중 하나가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이 의식적으로 과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것에 대해 경멸감을 느끼게 되는 특성인 것이다. 개인의 이익 계산이 과도해질 경우 집단 수준의 협업이 어려워 지기 때문에, 이 역시도 집단의 이익을 늘려주는 매우 합리적인 진화 결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모든 가치는 궁극적으로 이익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을 수 있다. 누군가는 특정 가치는 본질적으로 다른 가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민주주의, 애국심, 특정 형식의 미술 형태 등의 신격화 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가치관도 대상으로 삼는 집단의 크기, 그리고 단기적이냐 단기적이냐의 관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착한에게 잘해주고 나쁜 사람에게 정의 구현을 하고 싶어하는 것도 결국은 우리가 잘 살기 위해서 행해지는 것들이다. 본질적으로 이렇게 궁극적으로 모든 가치가 결국은 우리가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존재한다는 관점을 취한다면, 나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을 보다 유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삶을 통해 다양한 가치관을 접하고 취하게 된다. 그러나 가끔 우리는 특정한 가치관 하나에 지나치게 몰입하여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특정 그림을 그리는 데에 너무 심취하여 몇달이고 두문불출 하다가 스스로 우울증에 빠지거나, 노동 운동을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추구하며 협상 테이블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내는 일이 있을 수도 있다. 이처럼 인간은 아무런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오로지 허울뿐인 이상을 추구하며 고집을 부리기도 한다. 불교에서는 아무리 의미 있는 가치관일지라도, 그것이 집착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좋은 가치관이 아니라고 말한다.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란 고정된 좋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존재가 아닌 상황에 따라 알맞는 가치관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에 가깝다. 모든 가치는 결국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더 유연한 삶의 태도를 취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위해서도 타인을 위해서도 더 나은 존재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